양 산성의 초축은 화강암으로 통일신라서 발견된 적 없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백제초기 중심성으로 역할 못해


 그러나 모두가 명확하게 남한산성과 이성산성을 어느 시대의 축성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광주시민으로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고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지 바로 잡아야 할 것이며, 앞으로 우리지역에 산재 되어 있는 문화재의 성격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 기존 현대의 역사가들은 몽촌이나 풍납토성을 백제의 도읍지 중심성으로 지적하였기 때문에 학설을 바꾸지 않는 학자들의 속성과 그 어느 누가 자기 학설이 무너지기를 원하겠느냐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오랫동안 발굴하였던 남한산성과 이성산성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주변 유적과의 연계성과 출토되는 유물의 성격 등을 비교함으로써 역사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남한산성, 이성산성, 풍납토성, 몽촌토성 등 주변에는 많은 유적들이 산재되어 있으나 지금까지 별개의 제각각 달리 생각함으로써 각자 단편적인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한산성의 성격은 한강 본류의 성곽 중에서는 제일 험준한 지역에 축성한 성으로서 지금까지 성이 함락된 적이 없을 만큼 방어에 유리한 지역이다.


 청나라가 침입했을 때도 성이 함락된 것이 아니라 식량의 부족 등 굶주림에 의해서 항복하였던 것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성곽으로 유사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 만큼 역사 기록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300년 동안 산성도시로서 행정의 중심지로 오랫동안 유지되었고 백제시대의 기록에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이고 한산으로 천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 남한산성 대형건물 발굴조사결과 천주(天主)라는 명문기와와 길이가 64센치미터와 무게 19키로그램인 대형명문가 다량 출토되었고, 또 한산이 지금의 남한산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유물로서 약정사(藥井寺)가 한산에 있다는 문헌 기록과 명문 와편을 남한산성 북쪽에서 발견되었다.


 고구려의 대규모 보복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남한산성으로 도읍지를 옮기게 되었던 것이며, 백제가 공주로 도읍지를 옮긴 후에도 한산성에 치소를 정한 기록이 있을 정도로 유사시에는 안전지대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신라에서는 대부분 한산을 중심권으로 정할 만큼 거점이 된 행정 명칭이 나타남으로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전쟁시에는 피난처가 되었던 남한산성이며 또한 여주, 이천, 송파 등 평야지대를 굽어 볼 수 있는 위치로 한강본류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입지 조건으로 요충지로서의 시야가 트여 있는 곳이다.


 이와같이 남한산성은 어느 시대든 위급할 때는 남한산성을 이용하였는데 가까운 거리에 위험한 야산인 이성산에 왜 정교하게 다듬은 석성을 약 1.7km나 쌓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서 어느 시대 어느 국가이기에 남한산성보다 하남의 고골일대를 지키기 위해서 남한산 주위에서는 생산되지 않은 화강암을 한강 건너에서 가져와서 공들여 성을쌓았던 것일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석성 중 에서 제일 발달한 가공과 축성으로서 고구려나 신라에서는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는 석성이 남한산성 초축과 이성산성에서 발견된 것이다.


 또한 이성산성 내부에는 8각 9각 12각 등의 특수 건물들이 건립되었다는 것도 일반적인 성에는 없는 것으로 이성산성 에서만이 유일하며 주위에는 목조 단일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의 교산동 건물지와 초기의 평지 사찰로서는 최대의 면적에 속하는 천황사 등 모두가 이성산성 보호 구역에 있는 축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밝히고자 하는 고대 도시 즉 백제 초기 도읍지였을 것이라는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남신문(www.ehana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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