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하남시협의회 자문위원-정 민채

  (제 5 회) 연해주 한인의 강제이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탄공화국과 그 외 여러 지역에 40여만 명의 한인들이 잊혀 진 역사의 뒤편에 소외된 채 어렵게 살고 있다. 그들이 연해주에서 겨우 자리를 잡을 때, 1937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그 과정에서 한인들은 소련 당국에 의해 수많은 목숨을 잃었고, 가까스로 살아남았다고 할지라도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미 1922년 말부터 러시아 공산당은 한인들을 극동지방에서 타지방으로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사실 극동지방의 한인의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긴 것은 이미 제정러시아 때부터 여러 관리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며, 공산당의  일부 책임자들도 이런 생각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세력인 적군과 차르왕조를 유지하려고 했던 백군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한인들은 러시아 적군을 도와 승리하는데 혁혁한 기여를 했지만 러시아의 안보문제를 생각할 때 미덥지 못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러시아 공산당은 ‘한인들이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갖고 있다’고 판단하고, 러시아국적을 갖지 않은 다수의 한인들을 그들의 안보에 바람직한 존재로 간주하지 않았다.  

  1926년 러시아 공산당이 극동의 한인 이주 문제를 다시 들고 나왔다. 러시아의 기본정책은 한인들을 내륙 깊숙이 이주시키고 국경지대에는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러시아인을 포함한 유럽이민을 받아들여 한인들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계획이었다. 변방을 러시아인들로 채운다는 것은 이미 제정러시아 때부터 연속적이고도 확고한 러시아의 이민 정책이었다. 

  결국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한인이주를 결정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한인들을 일본의 스파이 내지는 적어도 잠재적 스파이로 간주하여 극동지역을 떠나게 했다는 것이다. 극동에서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되면 한인과 일본인을 구별하기 어렵고, 일본의 스파이가 암약하기 쉬운 토양을 근절하는 것이 최상 책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또한 스탈린은 한인들의 항일운동이 일본의 대 러시아 선전(宣戰)의 구실을 줄 수 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게다가 연해주에 한인들이 너무 밀집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 자치구를 요구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중앙아시아에 버려져 있던 광활한 땅을 개척하여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다는 설이다. 영토에 비해 인구가 적었던 러시아로서는 국토를 개발할 인력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연해주에서 한인들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고, 늪을 옥답(沃畓)으로 만드는 한인들의 경작능력을 익히 보아왔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러시아 당국으로서는 능히 이주 계획을 세울만했다.

  강제 이주된 한인들의 수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대략 18만정도로 알려져 있다. 한인들은 불과 출발 4〜5일 전에 이주 통보를 받았으며, 왜 떠나야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으며 물어볼 곳도 없었다. 러시아 당국은 이주 통보를 한 후 한인들의 여행을 중지시켰고, 마을과 마을 간의 교통도 차단시켰다. 경찰은 한인마을을 포위하여 한 사람도 이탈자가 없도록 강경조치를 취하였다.

  ‘만약 반항하거나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가 있으면 엄벌에 처한다.’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에 앞서 한인 지도자급 인사 약 2,500명을 사전 검거하여 소요의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였고, 수송열차가 떠난 후에 은밀히 이들을 처단하였다.

  한인들은 고향에서의 굶주림과 관리들의 핍박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로 꿈을 찾아 이주해 왔지만 일본인들에게 습격당하여 죽음을 당하고, 러시아인들에게 경계대상이 되어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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