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하남시협의회 자문위원-정 민채

한인들을 실은 첫 열차는 1937년 9월 21일에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출발했다. 막 추수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한인들은 그 동안 온 정성을 들여 알뜰히 일군 농토와 농작물, 집과 가축, 농기계 등 모든 재산을 남겨둔 채 며칠간의 식량과 옷가지를 가지고 열차에 올랐다. 열차에는 가축 분뇨냄새가 지독하여 코를 들을 수가 없었다. 열차가 달리면 널빤지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와 추위가 매우 심했다.

더욱 곤란한 점은 차가 달리는 사이 대소변을 봐야 할 때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노인과 어린이들의 경우에는 염치고 체면이고 차릴 수없이 실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목적지까지는 대개 40여 일이 걸렸는데 사람들은 모두가 지쳤고 식량도 떨어졌다.

겨울이 닥쳐오자 노인과 어린이들은 병마에 시달렸고, 추위와 굶주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사람이 죽으면 흰 옷이나 헝겊을 흔들어 사람이 죽었음을 알렸다. 위생상태가 극도로 불량하여 전염병이 생겼고, 여자들의 머리와 남자들의 옷에는 이가 득실거렸다. 열차가 역에 도착하면 여자들은 창을 열고 머리칼을 털었고, 남자들은 속옷을 벗어 털었다. 이가 하얗게 쏟아져 나왔다.

큰 역에 열차가 서면 경비병들이 병자를 조사하여 데려 갔다. 완치하여 돌려보낸다고 약속을 하고 데려간 후로는 실종되었다. 이러한 소문이 나돌자 가족가운데 환자가 생기면 알리지 않았고, 병자도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러한 강제 이주는 사람으로서는 실로 견디기 어려운 비인간적인 만행이었다.

수송과정에 ‘왜 이주하느냐, 어디로 가느냐’를 따져 묻거나 또는 ‘비인도적 처우에 대하여 항의하는 사람’은 다음 역에 도착하면 연행되어 행방을 모른 채 실종되어 버렸다. 또한 이주 중에 가족들이 여러 열차로 흩어지는 바람에 이산가족이 생겨났다.

더 큰 사고는 1937년 11월 초순 하바로프스크 근처의 베리노역에서 505호 열차가 충돌해 앞의 7개 차량이 완전히 전복됐다. 이 사고로 21명의 한인이 사망했고, 50여명이 부상당했다.

한인들은 극동에서 40여 일간 1만여 km를 달리는 기나긴 기차여행을 한 후 중앙아시아 지역(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에 도착했다. 이곳은 황량한 벌판으로 제정 러시아 때부터 유배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일단(一團)의 한인들은 저녁 6시에 하차했다. 이들이 들판 군데군데에 모여 앉아 밤을 지새우는 모습이 마치 양의 무리가 떼를 지어 서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밤새도록 우는 어린이의 울음소리, 노인들의 기침과 한숨소리는 모든 이를 잠 못 이루게 만들었다. 꼬박 밤을 새웠다. 이들에겐 살길이라곤 찾을 수없는 고립무원의 고도에 팽개쳐진 절망뿐이었다.

그러나 한인들은 슬퍼하고 분개할 겨를도 없이 눈앞에 닥친 겨울을 어떻게 넘기느냐에 여념이 없었다. 땅굴을 파고 갈대를 베어 움막집을 지었다. 겨울을 나는 동안 추위와 굶주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극도로 불결한 위생 상태와 아무런 의료대책이 없는데다 전염병마저 만연되어 병에 걸렸다하면 속수무책으로 죽음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잔인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살아남은 한인들은 물을 찾아 강가에 모여들어 수로(水路)를 만들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을 일구었다. 조상들이 “굶어죽어도 종자벼는 베고 죽는다.” 고 했던 속담대로 그들은 이주 당시 관헌들의 눈을 피해 볍씨를 몰래 숨겨 가져왔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곳 토양은 다행히도 몇 천 년 묵은 초원지대라 비료 없이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자연의 덕분으로 한인들은 첫해 추수 후에 가옥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고난을 극복한 이주 한인들은 민족 유전(流轉)의 역경을 거치면서 더욱 강인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하남신문aass6517@naver.com

저작권자 © 하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