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에서 한성백제의 왕궁터 발굴
오순제 박사 / < 한국고대사연구소 소장, 명지대교수 >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어 조선왕조의 왕도를 위호하는 중요한 성터로 이 두곳에는 왕이 피난 할 수 있는 행궁이 존재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선조가 실제로 피난하였던 중요한 곳이다.
광주군은 상궐과 하궐로 구성되어 있는 남한산성의 행궁(行宮)터를 복원하기위해 그 기초적인 작업으로 행궁터를 년차적으로 발굴하고 있는데 지난번 상궐(上闕)터의 발굴과정에서 이미 한성백제시대의 토기편이 다량으로 나왔다. 이와아울러 이번 하궐(下闕)터 발굴에서 조선시대의 건물지 밑에서 대형건물지를 발굴하였는데 이것을 ‘신라시대 건물지’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발굴된 기와는 두께가 4cm 정도로 매우 두껍고 매우 큰 기와로 신라의 왕도였던 경주(慶州)지역에서는 발굴된 적이 없는 거대한 기와로 국력을 나타내주는 중요한 표징이다. 이와아울러 ‘天王’, ‘天主’ 등의 명문기와가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백제의 천하관(天下觀)을 나타내는 것으로 백제가 천하의 중심에 있음을 상징하며 이미 발굴된 하남시 고골지역 백제왕도의 중심지에 있는 ‘天王寺’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 절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목탑심초석이 나왔으며 고려사, 세종실록의 기록에서는 이 목탑에는 백제에 불교를 전해준 마라난타 스님이 인도로부터 모시고 온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모셔져 있었다고 할 정도 매우 중요한 절터이며 우리나라 최대의 철불이 이 절에 모셔져 있었던 것이다.
백제의 온조는 졸본부여가 있었던 환인지역에서 한강유역으로 하북위례성인 방학동토성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는데 북쪽의 낙랑국과 맥족의 잦은 공격을 받으므로 도읍을 옮길 목적으로 신하들과 함께 부아악인 북한산 백운대에 올라 강남쪽을 조망하고 시찰하여 한산하에 터를 잡고 성곽인 책(柵)과 궁궐을 공사하였다.
그리고 궁궐과 성곽이 완성되자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는데 이곳은 동쪽에는 큰 산이 가로 막혀 있고 북으로는 한강이 흐르며 남으로는 한산(漢山)이라는 큰 산이 있으며 그 남쪽으로는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또 강변에 제방을 쌓았는데 동쪽의 큰 산이며 왕이 등극하면 올라가 하늘에 고했던 동명묘가 있었던 숭산(崇山)으로부터 동쪽의 사성(蛇城)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곳의 서북쪽 강건너에는 왕도로 쳐들어는 적을 막기위한 중요한 성곽인 아차산성(阿且山城)을 건설하였다. 왕궁과 제방사이에는 넓은 평야지대가 있어 백성들이 이곳에 흩어져 살았으며 홍수가 나서 이들 민가가 떠내려가기도 하였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에 이르러서 백제의 국력이 매우 강성하여져 일본의 아스카(飛鳥)문화를 건설하고 중국의 동부연안인 요서, 산동성, 절강성 등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경영하였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죽였다. 그는 고구려의 대대적인 복수전에 대비하고자 평지에 있던 왕궁을 한산으로 옮겼다. 이 당시의 한산성(漢山城)는 북한산성이 아니라 현재의 남한산성이다. 왜냐하면 북한산성은 한강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어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한다면 한강에 의해 퇴로가 끊길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남한산성으로 옮겼을 당시의 왕궁터가 조선시대의 피난궁궐인 행궁이 자리잡은 터에서 이번에 발굴된 것이며 이곳에서 나온 기와는 신라나 고구려의 기와 보다도 더 크고 두꺼운 것으로 근초고왕 당시 삼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로 그가 황제(皇帝)를 상징하는 황색(黃色)깃발을 사용한 것은 백제가 세계의 중심인 황제국이였음을 만천하에 공포한 것으로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이번에 발굴된 ‘天王’,과 ‘天主’라는 명문기와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개로왕(蓋鹵王)조에는 그 당시 도성인 한성(漢城)이 북성과 남성으로 구성되어있는데 고구려의 공격을 북성에서 7일간 막다가 남성으로 옮겼다고 한다. 고구려의 예를 들면 국내성과 안학궁성은 평지성이며 그 뒤에 자리잡은 환도산성과 대성산성은 산성이였는데 적의 공격으로 평지성이 함락당하며 산성으로 들어가 버티었었다. 이것을 보면 남한산성은 피난성인 산성으로 한산이라고 지칭되던 남한산성(南漢山城)이 된다. 왜냐하면 온조왕이 한강남쪽에 있는 한산 북쪽 밑에 하남위례성이라는 평지성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즉 왕도의 구조에서 한강→제방→민가→평지성→한산성으로 배치되어 있었음을 알수있다.
정부는 남한산성에서 발견된 한성백제의 왕궁을 정밀 조사발굴하여 복원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남시 고골 일대에서 행해진 교산동대형건물지(校山洞大型建物址)의 한성백제시기의 궁궐터와 이성산성(二聖山城)의 백제시대 제사유적인 9각,8각,12각건물지와 백제시대의 대형사찰인 천왕사(天王寺), 동사(桐寺)터 발굴들이 백제가 아닌 신라나 고려로 탈바꿈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를 다시한번 범한다면 서해와 남해를 주름잡으며 대륙을 경영하였던 위대한 500년 한성백제의 역사는 영원히 몇몇 사람들의 손에 의해 잠들어 버릴 것이다.
하남신문(www.ehana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