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전문위원·단국대학교 초빙교수-정성권
고려 광종은 황제로 등극한 직후인 961년 하남 동사를 천왕사와 바로 인접한 곳에 건립하였다. 동사는 천왕사를 의식하여 의도적으로 창건한 사찰로 초대형 불상과 건물이 조영되었다. 하남 동사와 더불어 황제국 체제 완성을 위한 광종의 치밀한 준비 작업은 죽주(안성)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집중되었다. 광종이 죽주에 자리한 사찰과 산성을 집중적으로 수리하고 신축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의 정책에 반발하는 세력들을 감시하고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광종은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세력에 대한 대비를 치밀하게 준비해 나갔다. 광종은 자신과 권력투쟁을 벌였던 진천 및 청주 세력을 견제하고 그들이 반기를 들었을 때 이를 제압하기 위해 진천의 북쪽과 주요 교통로 등에 사찰을 건립하였다. 또한 평택에는 새롭게 바파산성을 축조하고 기존에 존재하였던 진천 북쪽의 산성을 수리하였다.
이러한 광종은 961년, 하남의 천왕사 바로 옆 동사에 전면 38m 길이의 금당을 만들었으며 그 안에 ‘우리나라 최대의 불상 대좌’와 거대한 소조불상을 조성하였다. 광종이 동사에 초대형 소조불상을 조성한 이유는 ‘세계 최대 철불’인 천왕사지 철불을 의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961년 광종 재위 시기 만들어진 하남 동사의 소조불상은 석굴암 본존불을 모방한 천왕사지 철불과 다른 생김새였을 것이다. 아마도 955년경(광종 6) 제작된 서산 보원사지 철조여래좌상과 같이 개성적인 상호를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광종이 자신의 정적을 의식하여 대형 불상을 조성한 사례는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이 조각된 곳은 광종을 지지하는 충주 세력과 혜종 및 정종을 지지하였던 진천 및 청주 세력이 만나는 접경지대 같은 곳이다. 이곳은 한때 혜종을 지지하였던 문경의 발해 유민과 진천 및 청주 세력이 소백산맥을 넘어 서로 통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 고려 광종은 발해에서 유행하였던 이불병좌상을 대형 마애불 형태로 조각하여 발해 유민이 광종을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초대형 마애불인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의 조성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대형 사찰인 하남 천왕사가 이미 번창하고 있음에도 또 다른 대형 사찰인 동사를 천왕사 바로 옆에 건립한 이유는 광종이 천왕사를 의식하고 견제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광종이 천왕사를 예의 주시한 이유는 광종이 진천·청주 세력을 의식하고 견제한 것과 동일한 이유로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광종이 961년 동사를 창건한 이유는 961년을 전후하여 조성한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의 건립 배경과 동일한 배경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봉업사지 인근 교통의 요충지에 세워졌다.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이곳에 만들어진 이유는 직접적으로 진천 및 청주 세력에게 찾을 수 있으며 간접적으로는 전국의 백성들에게 황제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매산리 불상의 건립 배경과 마찬가지로 광종은 천왕사 바로 옆인 동사에 천왕사 철조여래좌상보다 더 거대한 불상과 건물을 만듦으로써 자신의 권위와 힘이 천왕사 철불을 만든 세력보다 높다는 점을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광종이 의식한 천왕사 철조여래좌상을 만든 세력은 누구일까. 이는 진천·청주 세력과 마찬가지로 광종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천왕사와 관련된 반 광종 세력은 바로 혜종과 왕규를 들 수 있다. 왕규는 혜종의 장인이며 태조 왕건의 명을 받아 개국공신 박술희와 함께 혜종을 적극 후원한 인물이다. 하남(광주)의 대호족 왕규는 고려사 열전 반역조에 기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충주유씨 세력에 대항하다 죽임을 당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혜종은 왕규와 박술희를 두 축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는데 943년 5월에 즉위하였으며 그의 나이 33세인 945년 9월에 죽었다. 혜종을 지지했던 왕규는 945년 그를 따르던 30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왕요군(정종)으로 대표되는 충주유씨 세력은 혜종을 폐위시키는 과정에서 왕규를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혜종과 왕규는 945년 제거되었으며 개경에서 그를 따랐던 세력 역시 함께 처형되었다. 그러나 왕규 근거지인 현재의 하남 일대에서는 광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여전히 반 충주유씨 정서가 지속되었다.
왕규는 자신의 두 딸을 태조 왕건에게 시집보내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딸을 혜종에게도 출가시켰다. 하지만 혜종과 왕규는 충주유씨 세력의 반란으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친 혜종 세력이었던 청주와 진천세력이 혜종이 죽은 지 10여 년 지난 광종 대에도 여전히 반 광종의 정서가 있었던 것처럼 현재의 하남 지역 주민들 역시 반 광종 정서가 매우 강했다. 특히 왕규와 함께 처형된 300여 명의 사람들이 대부분 하남 지역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천왕사지가 자리한 하남 지역의 반 광종 정서는 진천이나 청주 세력보다 적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광종이 동사에 ‘우리나라 최대의 불상대좌’를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소조불상을 조성한 이유 중 하나는 ‘세계 최대 철불’인 천왕사지 하사창동 철조여래좌상을 의식한 결과로 생각된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천왕사에 봉안된 철불로 알려져 있으며 그동안 조성시기는 주로 태조 왕건대로 연구되었다. 그러나 태조 왕건 시기 만들어진 기념비적인 대형 불교미술품을 살펴보면 태조 때 조성된 석탑, 불상, 탑비는 모두 통일신라와 의도적인 차별성을 강조한 양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통일신라 석굴암 본존불을 그대로 모방한 천왕사지 철불은 태조 왕건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기 어렵다. 동사에 천왕사를 의식하여 대형 사찰과 소조불이 광종에 의해 새롭게 창건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천왕사지 하사창동 철조여래좌상은 반 광종 세력, 즉 혜종과 왕규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천왕사지 철불이 혜종과 왕규에 의해 제작된 근거를 좀 더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서는 천왕사지 철불이 통일신라 불상 양식을 직접적으로 모방한 이유와 혜종 대 조성된 다른 불상에 대해서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칼럼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