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국가유산청 문화유산전문위원·단국대학교 초빙교수-정성권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전문위원·단국대학교 초빙교수-정성권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전문위원·단국대학교 초빙교수-정성권

하남 동사(桐寺)에서 석탑 뒤편에 있는 작은 산길을 따라 동사 동쪽의 낮은 언덕을 넘어가면 하남 교산지구가 나온다. 하남 교산지구는 안성 봉업사지 일대와 더불어 유적의 밀집도가 경기도 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특히 교산지구 내에는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천왕사지가 교산지구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변에 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다.

하남 교산지구는 수도권 주택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하여 정부에 의해 20183기 신도시로 지정되었다. 교산신도시 지구단위계획은 2019년에 발표되었으며 교산신도시의 전체 면적은 6,862,463이다. 하남 교산지구와 주변 지역에는 선사시대와 역사시대 유적이 다양하게 존재하는데 특히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다. 불교 유적을 보면 하남 교산지구와 주변 지역에는 15개의 사지가 분포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고된 15개의 사지는 동사지를 비롯하여 천왕사지, 봉수사지, 광암동사지, 교산동사지, 법화사지, 상사창동사지, 신복선사지, 약정사지, 자화사지, 천현동사지, 금암산사지, 하사창동사지, 하산곡동사지, 범굴사지 등이 있다.

이 사지 중 하남 동사지와 봉수사지는 발굴조사를 통해 통일신라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그 위에 고려 광종이 사찰을 다시 창건한 것임이 밝혀졌다. 봉수사지는 하남 동사에서 정남향으로 1.8k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하남 동사지와 더불어 봉수사지는 고려 광종 재위 당시 현재의 하남 일대를 대상으로 시행한 고려 조정의 정책을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봉수사지 위치

봉수사지는 1995년 세종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를 통해 구체적인 봉수사지의 범위를 알 수 있었다. 당시 지표조사에서는 원형 주좌가 있는 초석을 비롯하여 다수의 토기와 기와편 등이 발견되었다. 1998년에는 이곳에 건물이 신축되면서 땅속의 석재 유구가 일부 드러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후로 주변에 주택과 창고들이 신축되어 건물지의 전체 규모를 찾기 어려운 실정이 되었다.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봉수사지 일대에는 많은 초석이 있었으며 1960년대까지도 석불죄상이 있었다고 한다. 봉수사에 관한 문헌기록은 신증동국관지승람 광주목조에 약정사, 신복선사와 함께 한산에 있었다고 하므로 하남시 항동 일원이 봉수사지로 추정되고 있다.

2014년에는 봉수사지 북쪽 지역에 해당하는 하남시 항동 400-8번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나말여초에 해당하는 유적과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유물로 보아 사찰이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출토된 유물 중에는 8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연화문 막새기와와 건덕칠년(乾德七年)’(969, 광종20) 명문기와가 수습되었다. 이와 함께 954년 조성된 충주 숭선사지 창건기 기와와 유사한 막새기와도 함께 발견되었다. 봉수사지에서 출토된 막새는 신유(辛酉)’(961, 광종12) 명문기와와 함께 출토된 동사지 막새와도 유사한 모양이다. 이러한 점을 통해 봉수사지는 8세기경 창건된 후 고려 광종대에 다시 사찰이 건립된 곳으로 파악되었다.

봉수사지에 있었던 사찰의 건립 배경은 봉수사지의 위치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봉수사지는 동··남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교산지구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남한산성 북문과 인접한 곳이다. 남한산성의 본래 이름은 주장성으로 6728월 나당전쟁 기간 중 신라에 의해 축조된 초대형 산성이다. 봉수사지가 자리한 곳은 주장성의 주요 입구인 북문의 초입에 해당한다. 바로 이곳에 8세기경 사찰이 창건된 이유는 주장성의 주요 출입구였던 북문의 관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한산성(주장성)
 남한산성(주장성)

고려 광종은 천왕사의 남쪽에 해당하는 봉수사지에 969년경 다시 새롭게 사찰을 건립하였다. 광종이 961년 동사를 대대적으로 건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사에서 직선거리로 1.8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다시 사찰을 건립한 것이다. 광종이 봉수사지에 사찰을 조성한 이유는 통일신라시대 이곳에 사찰이 처음 조성된 이유와 크게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종대 봉수사지에 다시 사찰을 건립한 이유 역시 주장성과의 연관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교산지구 일대 유적현황
교산지구 일대 유적현황

중심에 천왕사지가 있는 현재의 교산지구 일대는 혜종과 그를 지지한 대호족 왕규의 핵심 세거지였다. 광종은 자신의 정적이었던 혜종과 왕규를 제거한 이후에도 그들을 지지하였던 세력의 본거지인 천왕사지 일대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광종은 현재의 동사지에 대형 사찰을 창건하였다. 동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면이 산으로 막혀있는 교산지구 남쪽의 봉수사지에 광종이 다시 사찰을 창건하였다는 점은 주장성의 길목을 감시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광종이 969년 봉수사지에 사찰을 창건한 이유는 동사가 창건된 배경의 연장선 속에 해석할 필요가 있다. 주장성은 나당전쟁시기 신라가 당나라와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조성한 대형 산성이다. 역사상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주장성에 반광종 세력이 들어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이들을 쉽게 진합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즉 봉수사지에 광종이 사찰을 창건한 것은 반광종 세력이 바로 인근에 있는 천혜의 요소인 주장성을 이용할 가능성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통해 보면 동사는 그동안 알 수 없었던 교산지구 일대의 사찰 창건 배경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또 다른 사료(史料)라고도 할 수 있다. 사료에 기록이 없는 다양한 사실을 밝혀주는 동사는 1000년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저작권자 © 하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